Babel

00
나에게 망자를 위한 미사곡을.

01

' 나는-.. '

02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아름답게 제 모습을 보일 준비를 끝마친 작은 꽃송이. 그게 무척이나 소중해서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타인을 위해 그 무엇 하나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그녀가 본다면 ' 달라지지 않았어. '라고 말해줄까?

노을 진 태양의 붉음이라 불렸던 제 빠알간 머리카락은, 이제 이름을 바꾸어 피를 뒤집어쓴 죽음이라 했다. 예전에는 참 자랑스럽게도 느꼈건만.. 절로 찌푸려진 미간 때문인지 무척이나 드세 보이는 얼굴이다.

짙은 눈썹 아래로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것처럼 반짝였던 눈동자. 다시 빛낼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잔잔히 깊은 수렁 속에 잠겨있다.
얼굴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03
나의 침식된 울음, 그 사이로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블리오소.

04
끝없는 기다림 속에서 태어난 것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인간들의 죄. 부서진 심장에서 태어난 것은 구원을 위한,



바벨. 그가 신의 문에 더욱 가까워짐과 동시에, 세계 또한 멸망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05
세계의 종말을, 나 자신의 종말까지 바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완전치 못한 신이 되었다는 건 절망에 가까운 일이었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세상을 위해 내 한 몸이라도 바칠 수 있다면 만족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고, 나는 몰락했다. 몸에 품은 불행과 역병은 지나는 길마다 지독한 죽음의 냄새를 뿌렸고, 이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평화롭던 마을도, 행복하던 가정도. 내가 지나가거나 심지어는 눈길만 줘도 불행해지기 십상이었다. 나는 불행을 주는 게, 불행을 가지는 게 내가 지닌 마지막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나 자신까지 불행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완전한 끝이 다가온다. 그것은 나의 끝이었다. 세계에 내려진 암울한 저주를 내가 거둬가리라. 세상의 종말과 함께 나 자신의 종말을.
Flight Rising @kettchapp